1. 지난 주 목요일 낮, 우연히 NBA 중계를 보게 되었다.
피닉스 선즈와 LA 클리퍼스.
스티브 내시도 나이는 못 속이는 건가. 클리퍼스의 배런 데이비스에게 밀리는 기색이 역력.
하지만 4쿼터 중반을 넘어서면서 내시가 기운을 낸다.
연이은 득점, 마침내 동점 3점슛에 이은 결승 레이업까지. 내내 끌려 가던 시합을 원맨쇼로 뒤집어 버린다.
냉정하게 주먹을 쥐어보이는 그의 표정은 몇 년 전 뉴욕의 어느 바 텔레비젼 화면에서 봤던 바로 그것.
2. 그 동안 뉴욕 출장을 다녀온 게 세 차례.
가장 알차게 돌아다녔던 건 지난해였지만,
낯선 도시 뉴욕을 온몸으로 부딪칠 수 있었던 건 역시 2006년 5월의 첫 방문.
단촐한 인원에 비교적 여유 있는 일정, 급하게 출발하느라 사전 정보 하나 없었던 것도 어떤 면에서는 좋았다,
아무 부담도 계획도 없이 일 끝나면 여기저기 시내를 걷다가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힘들면 택시 타고.
숙소도 여지껏 묵어 본 곳 중 최고로 럭셔리한 곳이었다.
5번가와 6번가 사이, 센트럴 파크에서 두 세 블럭 정도 거리에 위치한 Chambers Hotel. 입지조건은 물론이거니와 우아하게 꾸며진 시설도 최고.
3. 출장 사흘 째던가 나흘 째던가,
그 날 일정을 마친 후, 동유럽에서 왔다는 예쁜 웨이트리스 언니가 있는 Rue 57 이란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 (Rue는 프랑스 어로 road라는 의미란다, 57th street에 있어서 붙인 이름이 Rue 57이라고),
그냥 숙소로 들어가기는 아쉬워서 일행분과 함께 센트럴 파크 쪽으로 슬슬 걸어가다 왼쪽 편에 보이는 바에 들어갔다.
맥주 두 병 시켜놓고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옷매무새가 멋지다. 이런 젠장, 술값 좀 나오는 덴가 보구만.
여기저기 천정에서 내려온 받침대에 놓인 대형 TV에서는 농구 경기 중계가 한창이지만,
이 사람들, 자기들끼리 이야기만으로도 바쁘다는 듯, 농구고 뭐고 간에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어차피 우리야 달리 할 일도 없고, 맥주 값이 비싸다니 할짝할짝 아껴 마셔가면서, 푹신한 소파에 지친 몸을 기대고, 편안하니 농구경기에 집중했다.
어렵쇼. 생각보다 큰 게임, 피닉스 선즈와 댈러스 매버릭스 간, 05-06 시즌 웨스턴 컨퍼런스 결승 1차전이다.
선즈는 1라운드에서는 코비 브라이언트가 버틴 LA 레이커스, 이어서 2라운드에서는 LA 클리퍼스를, 각각 4승 3패로 꺾고 컨퍼런스 결승까지는 올라왔지만,
그런 악전고투의 대가로 선수들은 지칠대로 지친 상태, 거기에 내시의 부상까지 겹치고 보니, 독일 병정 덕 노비츠키가 버틴 매버릭스에는 역부족이지 않느냐는 전망.
아니나다를까, 매버릭스는 경기 내내 우위를 보이며, 4쿼터 3분 30초를 남긴 시점에는 9점차로 리드.
헌데, 그때부터 내시의 투혼이 불타올랐다.
과연 부상으로 출전 가능성 여부조차 의심스러웠던 선수가 맞을까,
상대 팀에 한 골을 주는 동안 내시 혼자서 무려 10점을 꽂아 넣어 버린 것.
연이은 스틸로 한 골 한 골 따라갈 때마다 우리 테이블은 들썩들썩.
신기한 건, 그 와중에도 우리 말고는 누구 하나 경기에 호응하는 사람, 아니 제대로 TV 화면을 바라보는 사람조차 없다는 사실.
이런 무심한 태도가 시크한 뉴요커들의 특징이란 말인가.
마침내, 경기 종료 1분여를 남기고, 1점 차로 따라붙는 내시의 3점슛.
순간 바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이녀석들, 그러면 그렇지, 안 보는 척 하면서도 사실은 다 보고 있었던 거잖아?
그때부터 경기 종료까지는 모든 손님들이 하나되는 순간.
양 팀의 슛 하나, 드리블 하나에 탄식을 내뱉고 손뼉을 치고 술잔이 연신 비워진다.
1분간 엎치락뒤치락 하던 경기는 결국 4초를 남기고 선즈의 역전, 이어진 자유투까지 성공하면서 121 : 118로 승리.
다들 상기된 얼굴로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여담이지만, 결국 선즈는 종합전적 4승 2패로 파이널 진출에 실패, 우승은 이스턴 컨퍼런스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몫.)
어쨌든, 여러 악조건들 속에서도 불타는 투혼으로 차가운 뉴요커들의 평정심마저 흔들어버린 스티브 내시,
당신 덕분에 우리는 낯선 출장지에서 최고로 멋진 저녁을 보낼 수 있었답니다.